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트르 크로포트킨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ttachment/크로포트킨/Example.jpg|width=250]]}}}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ropotkin_Nadar.png|width=250]]}}} || || 황궁 근위 장교 시절 || [[펠릭스 나다르]]가 촬영한 크로포트킨 || [[러시아 제국]]의 [[모스크바]]에서,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크로포트킨 공[* 3개의 주에 걸친 넓은 땅과 농노를 무려 1200명이나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다.]의 4명의 자식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4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곧 재혼하였고, 엄격하고 허세많은 계모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여느 귀족들처럼 가정교사로부터 조기교육을 받았다. 15살에는, 귀족들만이 다닐 수 있으며 매년 최상급 우등생 16명이 궁정근위로 임명되는 [[페테르부르크]] 근위 사관학교에 합격했다. 궁정근위는 황족의 측근이 될 수 있어 큰 명예인 동시에 출세가 보장되는 길이어서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근위 사관학교에서 계속 수석을 하였던 그는 크고 작은 접견식, 무도회, 연회 등이 있을 때마다 궁정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시종무관을 하기도 했으나, 황궁이 돌아가는 꼴에 회의감을 느끼고, 수석 졸업 이후 당시 아무도 안가던 [[시베리아]] 오지 전출을 자원하였다. 시베리아에서는 미개척지를 탐험하며 지리학과 동물의 생태 환경 등을 연구하였고, 이 때의 연구를 기초하여 산맥 구조선 이론을 구상하고 잘못되어 있던 지도작도법을 수정하였으며 빙하에 대한 지질학적 논문을 작성하는 등의 과학활동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과학자로서의 길이 열렸고, 1867년엔 군을 퇴역하고 이듬해 러시아 지리학협회 정식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71년 마침내 지리학협회 사무관직 제안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영광스러운 그 자리를 거절한다. 그는 지리학을 사랑했으나, 주변에 배고픈 사람들이 진흙같은 한 조각 빵 때문에 투쟁하는 이 때에, 그 고상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어떻게 옳은 일이 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이 무렵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후 고통받는 민중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1년 뒤, 해외출장 허가를 받아 스위스 여행을 하는 중, [[인터내셔널]] 취리히 지부에 가입했으며, 스위스 쥐라 산맥의 시계 제조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이때, [[미하일 바쿠닌]]의 오른팔이었던 제임스 기욤을 만났다. 크로포트킨은 아쉽게도 바쿠닌을 만나진 못했다.] 이들이 이루고 있던 [[노동조합]] 형태의 자발적인 상호 협동을 보며 [[아나키스트]]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후로 러시아에 돌아와, 당시 [[브나로드 운동|브나로드]] 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소모임 '차이콥스키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나, 러시아 제국 정부에 발각당해 1874년 감옥에 투옥되었다. 2년 동안의 감옥생활 중 괴혈병과 류머티즘으로 죽음의 위기가 찾아왔고 감옥병원에 입원되었으나, 동료 아나키스트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감옥을 탈출했고, 이후 영국,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인터내셔널 활동과 신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881년 혁명가들에게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여러 군주국들은 스위스를 '망명객들의 피신처'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에 스위스는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크로포트킨을 포함해 각국의 망명객들을 추방하였다. 스위스 정부가 그에게 추방명령을 내렸고 그는 런던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1년 뒤 프랑스로 건너가 아나키스트 운동을 펼쳤으나, "광산과 모든 생산수단, 주택이 국가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부르주아 계급은 공포를 느꼈다. 당시 가난한 사회주의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의 분노를 테러로 표출했는데, 언론은 테러의 지도자로 크로포트킨을 지목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사회주의 운동에 충실했을 뿐, 그들에게 테러를 지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프랑스 정부는 그를 끝내 체포하고자 했다. 쫓기는 와중에 아내가 체포되고 처남이 숨을 거두자, 처남의 장례를 위해 감옥 정문 앞으로 출두하고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아내 곁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당국에게 거절당하고 바로 체포되어 리옹으로 호송되었다. 5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프랑스 내 지식인들의 지속적인 항의와 반발로 인해, 1886년 조기석방되어 1917년 [[러시아 혁명]] 전까지 30년간 영국에 거주하면서, 아나키즘 운동과 연구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러시아 혁명이 터진 이후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와 이때만 해도 상당한 세력을 자랑했던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을 중심으로 정치 활동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주도권을 탈취한 [[볼셰비키]]들이 아나키스트 서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우크라이나]]의 [[네스토르 마흐노|마흐노]] 흑군 탄압 등 아나키스트 숙청 작업에 점차 몰두하였다. 이에 크로포트킨은 볼셰비키의 수장, [[블라디미르 레닌]]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특히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중심으로 아나키스트 및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 [[멘셰비키]] 같은 다른 정파에 대한 박해를 두고 "동서고금을 들어 참 레닌만 한 혁명가도 없다. 다른 혁명가들은 어떠한 도덕적 이상을 위해 싸우는 반면 레닌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통렬한 비꼼을 가했다. 한편 그러면서도 외국의 친구와 동지들에게 "혁명이란 원래 결코 깨끗할 수 없고, 무질서는 변화의 필수적인 부분이다."라며 혁명과 민중의 자유를 향한 열정 자체는 옹호하였다.] >[[블라디미르 레닌|블라디미르 일리치]], 당신의 행동은 지금 당신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원칙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있소... 혹시나 변명이랍시고 정치인으로서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하는 건 의무라는 둥 요즘 절대 군주들도 하지 않는 말 따윈 않길 바라오. 당신이 전 유럽 [[공산주의]]의 선구자로서 이런 추악한 방법으로는 당신이 추구한다는 원칙을 이룰 수 없다는 걸 모를 만큼 자신의 권위주의적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오? 전 세계 공산주의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이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순수한 의사 표현조차 이렇게 짓밟으면 그 이념의 미래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오? >---- > - [[http://kr.theanarchistlibrary.org/library/pyoteureu-alregseyebici-keuropoteukin-reninege-bonaeneun-pyeonji|레닌에게 보내는 편지]] 수많은 아나키스트 동료들이 감옥에 갇히고 죽음에 처하는 사태에 이르렀지만, 다행히 크로포트킨은 볼셰비키 정권의 직접적인 박해는 받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 19세기 [[브나로드 운동]]과 러시아 사회주의 아나키스트들의 살아있는 거두였으며, 특히 당파적 분열을 넘어 제정 러시아 시절 좌파와 자유주의 세력 전체의 큰아버지뻘 인물이었기에, 레닌으로서도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레닌을 향한 크로포트킨의 지속적인 항의는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묵살당했다. 말년에 『혁명적 윤리학』을 저술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결국 1921년 2월 8일 새벽 3시에 숨을 거뒀다. 그 소식을 들은 측근 아나키스트들은 곧장 장례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소식을 전세계에 알렸다. 장례위원회는 형무소에 수감 중인 아나키스트들을 잠시 석방하여 고인과의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레닌]]에게 요구했고, 레닌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담당 실무자가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오자 장례위원들은 레닌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많은 외국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공산당 조직이 가져다놓은 조화들을 모조리 철거하겠다고 위협했고, 이에 놀란 담당 실무자는 아나키스트들을 잠시 석방하였다. 마침내 7명의 아나키스트들이 군중의 박수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장례식은 소련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반볼셰비키, 반정부 구호, 플래카드, 선동 등이 동원된 최후의 반정부 집회[*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이자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마지막 공개 집회가 되었다. 이때 그들의 플래카드에는 그의 명언인 '''권위가 있는 곳에는 자유란 없다'''가 적혀져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을 통해 이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그의 사후 [[1957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으로 [[모스크바 지하철 1호선]] '드보레츠 소베츠카야' 역이 그의 이름을 따 '크로포긴스카야'로 개명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